김포의 지명유래는 兄弟投金?
兄弟投金(投金浦)의 고사가 김포 지명 유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고려 공민왕(고려 31대 왕, 1351~1374) 때를 배경으로 하다.
다음은 양천강(지금의 양천구 공암진 : 옛날 김포군 양서면 소재) 전설에서 민담으로 회자 되어 『신동국여지승람』 양천현 조에 소개된 이야기다. 당시는 양천구(양서면), 강서구(양동면)이 옛날에는 김포 땅이었다.
※ 1963년(5.16 군사정변 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로 편입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두덩어리를 얻어서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동생이 갑자기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자 황금이 이로운 물건이 아니라 판단하여 강에 던졌다. 형이 그 연유를 묻고 자신 또한 황금을 강에 던졌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투금포 즉, 금(金)을 던진 포구(浦)라 한 데서 비롯돼 김포라 명명됐다는 이야기다.
경기도 내 가장 오래된 지명 ‘金浦’
김포의 옛 이름 검포(黔浦)의 ‘黔’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儉’과 같은 의미의 고대어로,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신군(神君)이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현재 김포 지역 내에 전해 오는 많은 지석묘들은 김포가 고대로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포구마을이었음을 시사한다.
김포지역은 지리적·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시대 각국의 각축장이었으며, 장수왕 63년(475) 고구려가 한강하구 지역을 차지했다.
이때부터의 김포일대 역사가 기록에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지리지편>에서 검포현(黔浦縣)[김포읍, 고촌면, 검단면], 수이홀(首爾忽)[양촌면, 대곶면], 평회압현(平淮押縣)[통진면, 월곶면], 동자홀현(童子忽縣)[하성면],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양동면, 양서면]이 기록돼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사 전국에 9주(州) 5경(京) 121군(郡) 290현(縣)을 설치했다.
김포지역에는 상위 행정단위인 장제군(長堤郡)의 통제를 받는 영현(領縣)으로 옛 검포현을 개칭한 김포현(金浦縣), 평회압현이었던 분진현(分津縣), 동자홀이었던 동성현(童城縣), 수이홀이였던 술성현(戌城縣)과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으로 제차파의현을 개명한 공암현(孔巖縣)이 편제됐다.
김포라는 이름은 고구려 시대에 검포현, 통진현, 양천현 3개 현이 있었으나,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검포현에서 김포현으로 명명된 것에서 시작됐다.
이는 경기도 정명 1,000년 보다 앞서며 전국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지명이다.
출처 : 김포문화원
우리동네 이름에 담긴 뜻
통진읍
통진현은 예전에는 분진현이라 불렸는데 그 명칭이 바뀐 것이에요. 분진현은 강이 남과 서로 갈라져 흐르는 '갈래나루고을' 이란 뜻이에요. 진은 강의 뜻도 있으니까 통진은 '갈래강 고을' 또는 ' 큰 강 고을' 이란 의미로 해석되네요.
고촌읍
고촌읍은 예전의 고란태면의 '고', 임촌면의 '촌'을 합친 지명이에요. 고란태면의 고란태는 '골안터'가 변천한 것이고 임촌면은 '수령이 있는 고을' 이란 의미가 있어요.
양촌읍
조선 시대에 양릉면과 상곶면, 반이촌면이 있었어요.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3개면을 합하여 양릉면의 '양' 자와 반이촌면의 '촌' 자를 따서 '양촌면' 이라고 지명을 만들었어요.
대곶면
대곶면은 대파면의 '대' 와 고이곶면의 '곶' 을 합성해서 만든 지명이에요. 대파면은 천신제를 크게 지냈다는 의미가 있었고, 고이곶면은 정신적으로 '높은 고을' 이란 의미인데, 천신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이 살던 고을의 뜻에서 이런 지명이 생긴 것 같아요.
월곶면
월곶면은 삼국시대에는 분진현, 고려 때는 통진현, 조선 초에는 통진현, 조선 숙종 21년 (1695년) 때는 통진부 부내면, 보구곶면, 월여곶면, 질전면으로 있다가 고종 때는 통진군, 광무 때는 김포군으로 변경됐어요. 그러다가 위 4개 면을 합하여 월곶면으라 이름 지었지요.
하성면
현재의 하성면이란 명칭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고종 8년(1871년) <통진부읍지>부터 기옥에 나타난 하은면의 '하' 와 영조 36년(1760년)붙너 있는 봉성면의 '성' 을 합성해 만든 것이에요.
북변동
북변동은 옛 김포군청(전 김포경찰서)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북변리라 한 것으로 고유어 명칭은 북녘말이에요.
걸포동
걸포동의 전래 지명은 '거래' 였고 한자표기도 현재와는 다른 걸포였어요. 걸포리의 다른 명칭은 걸개, 걸포천 등이 있고요, '걸' 은 개천의 뜻이에요. 이처럼 걸애 또는 거래는 개울, 도랑의 뜻이니까 이런 말이 지명에 쓰이면 '개울이 있는 마을' 의 뜻이 되는거에요.
감정동
감정동의 뒤에 중봉산이 있는데 그 산 밑에 우물이 아홉 개 있어 구우물이라 했는데 후에 구우물이 굳우물(坎井)로 변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장기동
예전부터 이 일대로는 강화로 통행하는 큰 길이 지나고, 또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짐에 따라 장터가 섰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생겼어요. 장기동은 '장터마을' 이라는 의미에요.
운양동
예로부터 운양포가 있어 운양리로 불러왔다는 설과 운양산 일대에 안긴 마을이라 하여 운양동으로 했다는 설이 있어요.
사우동
사우동은 마을이 조수가 드나들던 한강변에 위치에 갯벌에 모래가 많이 쌓였다 하여 "모래모퉁이 마을" 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불렸어요.
풍무동
풍무동은 풀무골 즉 한자로 야동(冶洞)이라고 했었는데, 조선조에 풍무리로 써 왔어요.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풍무리 전체의 형국을 보고 풀무골이라 했고, "풀무질할 때의 불꽃처럼 마을의 생활형편도 응했다 꺼졌다" 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어요.
구래동
이 마을은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여 '아홉 번이라도 다시 와서 살고 싶은 마을' 이란 뜻에서 '구래동' 이라 불러왔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마산동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옛 상곶면, 대마산리와 양릉면의 소마산리를 합하여 '마산리' 라 칭하게 된 것이에요. 마산의 유래는, 옛날에 의류의 재료로 대부분 삼베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마재배가 번창하여, 이 마을에서도 삼 재배를 많이 한 관계로 '마산리' 라 칭한 것으로 생각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