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의 지명과 관련된 투금포(投金浦)의 전설
김포라는 지명은 투금포에서 유래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어요.
고려말에 지금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이 된 옛적 양천 궁산, 공암나루 부근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요.
어느날 이 형제는 나루에서(감암포라는 설도 있음) 금덩어리 두 개를 주웠어요.
그리고 형제는 그것을 한 개씩 나누어 가졌지요.
그리고 둘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어요.
그런데 강 한가운데쯤 왔을 때 동생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금덩어리를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꺼내 물속에 던져버리는 것이었어요.
이것을 본 형이 깜짝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어요.
그러자 동생이 말하기를 "형님, 오늘까지 우리 형제간의 의리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된 것도 우리가 다 같이 가난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한 것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랄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큰 황금덩어리로 부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자연히 일도 안 하고 그로 말미암아 더 큰 욕심이 생기고 또 나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형제간의 의리는 갈라지고 서로 믿던 형제가 남남이 안 된다고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저는 갑자기 황금덩어리가 싫어지고 무서워져서 물에 던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어요.
형은 이 말을 듣고 "참 네 말이 옳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금덩어리가 무섭다."하고 곧 금덩어리를 던진 곳을 투금포라 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김포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조헌 선생과 관련된 여우재 고개의 전설
임진왜란 때 의병의 선봉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7백 의사와 함께 장렬히 돌아가신 중봉선생은 지금의 김포시 감정동에서 출생한 분이세요.
중봉이 서당에 가려면 도중에 여우재고개라는 고개를 넘어서 다녀야 하는데, 하루는 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예쁜 처녀가 나타나 중봉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던 후로는 날마다 그 처녀가 나타나서 중봉을 껴안고 입을 맞추곤 했어요. 하루는 서당 선생이 중봉을 보고 "너느 어째서 얼굴에 화색이 없고 병색이 되어 가느냐? 너 요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냐?" 하고 물으셨어요.
이에 중봉이 "네! 있었습니다. 서당에 오느라고 고개를 넘노라면 예쁜 처녀가 나타나서 강제로 입을 맞추곤 했습니다. 벌써 여러 날 그랬습니다."라고 털어 놓았어요.
이에 서당 선생은 "그 처녀하고 입을 맞출 때, 그 처녀가 무슨 구슬 같은 것을 네 입에 넣었디가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가지 않더냐?" 라고 물었어요.
중봉이 "그랬다."라고 하니까 선생은 "그 처녀는 인간이 아니고 여우가 둔갑한 처녀인데 그 여우가 네 기운을 빼앗아 가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입을 맞추고 구슬을 네 입에 넣거든 입을 꽉 다물고 돌려주지 말고 거기서 쏜살같이 뛰어 오너라" 하고 일러주었지요.
중봉은 서당 선생이 이른 대로 그 처녀가 입을 맞추고 넣어준 구슬을 입에 문 채 처녀를 떠밀고는 달려오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처녀는 중봉을 붙잡고 구슬을 도로 빼앗으려고 달려들었지요.
중봉이 뺏기지 않으려고 둘이 한참 옥신각신하다 중봉이 그 구슬을 삼켜버렸어요.
그랬더니 처녀는 슬피 울며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요.
그러고 나서 중봉이 서당에 갔더니 서당 선생이 그 구슬을 가져왔거든 내어 놓으라고 했어요.
중봉이 "여우에게 그 구슬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다가 삼켜버렸습니다."하고 말하니 선생은 "어허, 아까운 보배가 없어졌구나, 너는 그 구슬을 삼켰으니 땅의 이치는 환히 알지만 하늘의 뜻은 모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그리고는 "그 처녀는 원래 여우인데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먹고 사람이 되려고 너한테 달려들어서 네 기운을 빼앗아 먹던 중이었다. 그것이 안 되어 여우로 돌아간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그 중봉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통진 앞바다에 난데없이 대팻밥이 떠밀려 왔어요. 이를 보고 사람들이 중봉 선생께 무슨 징조인가 물었어요.
중봉 선생은 "그것은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려고 많은 배를 만드느라 대패질한 그 대팻밥이 흘러 온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중봉 선생이 어릴 적 그 여우구슬을 삼켰기 때문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환히 알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후 몇 년 안 가서 아니나 다를까 왜구가 조선땅을 쳐들어 와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어요.
병자호란과 관련된 애기봉의 전설
유유히 흐르는 조강을 굽어보고 수 백길 높이 솟은 애기봉은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요.
병자호란 때의 일이에요.
기생 애기는 평양감사와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의 운명을 모질고 슬프게 만든 전쟁이 일어났어요.
북쪽 오랑캐(후의 청나라)의 침략으로 감사와 애기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지요.
당시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서 걸어서 수 천 리 길을 가야만 했어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수 천 리를 걸어가야 하는 일이 힘겨운 노릇이었지만 감사를 따르는 애기는 참고 견디며 개풍군까지 왔어요.
그러나 감사는 오랑캐에 잡혀 끌려가고 말았어요.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혼자 강을 건너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감사가 돌아오길 기다렸어요.
애기는 하루하루 더해지는 감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쑥갓머리산(하성면 가금리 소재) 정상에 올라 감사가 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소리치며 애타게 기다리다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지요.
애기는 임을 행한 그리움으로 매일 애타게 기다리던 산 정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어요.
애기가 죽자 동네 사람들은 애기 유언에 따라 애기를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장사하고 그 산을 애기봉이라 불렀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애기봉은 북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한으로 맺힌 곳이랍니다.
손돌이 추위와 관련된 충신 손돌공의 전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이 있던 때에요.
한 임금이 피난하려고 강화로 들어가기 위해 손돌이라고 하는 뱃사공의 배를 타게 되었어요.
손돌은 물길을 잘 아는 뱃사공이라 조금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물길을 따라서 가고 있었는데, 강(염하강)의 파도가 세서 배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이에 임금은 자기를 죽이려고 일부러 이렇게 고약한 곳으로 배를 저어가는 것이 아닌가 손돌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임금은 불안한 마음에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령했죠.
이때 손돌은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임금께선 여기 제가 바다에 던진 바가지를 따라 배를 저어가면 무사히 염하를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어요.
이후 왕이 탄 배는 뱃사공 손돌의 바가지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와 목적지에 당도하였답니다.
왕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의 주검을 거두어 성대히 장사를 지내주었어요.
그 뒤 그가 죽은 날(음력 10월 20일)이 되면 엄청나게 세찬 바람이 불어 손돌의 원혼이 그렇게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여겨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때의 거센 바람을 '손돌이 바람', 이 무렵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 전해 오고 있어요.
천등고개의 전설
서울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고촌읍 신곡리를 지나 김포 시내로 오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있는데, 여기가 '천등고개'에요.
그런데, 이 고개 주변의 산은 그리 험하거나 높지는 않지만 아름드리 수목들로 꽉 찼었고 그 산속에는 산적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에 주민은 대낮에도 마음 놓고 고개를 넘을 수가 없었지요.
그리하여 신곡리 쪽이나 천등마을 쪽 사람들이 상대편 마을을 방문하려면 천 명이 모여야 산적들의 피해 없이 안심하고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고 해요.
천등고개는 '천명이 모여서 오르는 고개'로 원래 '천등(千登)고개'였을 것이나 어느 사이에 변하여 현재 한자로 천등(天登)으로 쓰고 있어요.
이 고개는 조선조 말에 강화도령이 임금(철종)에 오르려고 상경하던 길에 행차가 늦는다고 호령하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 하여 '천둥고개'라 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어요.